도룡동 성당은 1986년 창립 시(초대 백성수 시몬 신부)주보성인을 정하상 바오로로 정하고 그의 유해를 모시고자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839년 기해박해 시 서소문에서 참수형으로 치명하신 후 그분의 유해는 흔적이 남은 바
없었다. 정하상 바오로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게 된 사유는 그가 평신도 지도자의 모범으로 북경을 9차례나 오가며 초창기 조선 신자들의
모임을 위해 성직자를 영입하신 모습이, 도룡동 신자들이 신설 본당 분리를 위해 주교님께 청하는 모습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우리 본당 안에 성인의 유해를 모시자는 노력은 꾸준히 계속되어 2011년 4월 16일 (5대 권일성 베드로 신부) 호남교회사연구소에
보관 중인 103위 성인 중 두 분의 유해를 모시고 와서 한빛당 제대 안에 안치하여 공경하고 있다.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와 성 한재권
요셉 성인은 두 분 모두 충청권 고향의 선비 출신으로, 대덕연구단지 연구원 중심의 도룡동 본당 신자와 유사한 점에서 공감대를
이루었다. 두 제대 성인은 병인박해 1866년 12월 13일 같은 날에 전주 숲정이 성지에서 참수형으로 치명하신 후 1968년 복자품에
오르시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내한 시 본당 주보성인이신 성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더불어 한국 최초의 103위
성인으로 시성되셨다.
성 정문호 바로톨로메오
1801년 충청도 임천 (현 충남 부여군 충화면)에서 출생하여 충청도 고을의 원님까지 지낸 양반 출신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후에는
관직을 그만두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정문호는 학식과 교양과 인격을 겸비했던 분으로 영세 입교한 후에는 남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65세 되던 병인년 박해 시 체포되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희색이 만연한 채 동료들에게 “오늘 우리는 천당으로 과거시험
보러 가니 즐겁구나.” 하며 과거시험과 순교의 길을 비유한 일화가 남아 있는 분이다. 그의 묘소는 현재 전북 천호성지에 있다.
성 한재권 요셉
한재권은 청주 한씨이며 1829년 충청도 진잠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그 지역의 천주교 신도 회장을 지냈다. 병인년 박해시 정문호와
함께 체포되어 같은 날 같은 자리 전주 숲정이 성지에서 그의 나이 37세에 참수형으로 치명하셨다. 그의 아버지 한언적은 아들을
구명하려고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며 매달렸으나, 배교를 재촉하는 감영장에게 “사람이 세상에 있어 좋을 때에는 부모를 부모라 하고,
어려울 때에는 부모를 부모라 아니 하오리까. 그러므로 못하나이다.”라는 일화를 남기고 치명하신 분이다. 그의 묘소는 정문호와 같이 천호성지에 모셔져 있다.